[칼럼] 어느 노숙인의 죽음
[칼럼] 어느 노숙인의 죽음.
얼마 전 역사에서 내쫓긴 노숙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한겨울 밤이었다. 대합실 출구 앞 대리석 바닥으로 노숙인을 밀어낸 코레일 직원과 공익요원이 즉각 기소되었다. 사인은 갈비뼈 골절 등 ‘고도의 흉부 손상’, 찬 바닥에 던져진 노숙인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숙인이 동사(凍死)했다면 유기치사에 해당되나 사인이 밝혀지면서 두 기소인에게는 유기 혐의만 적용되었다.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 역사 내 노숙은 불법이므로 '퇴거조치는 정당한 권리행사'라 할 수 있고, 부상자라는 걸 인지했다면 병원에 보내야 했으나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구조의무는 없다'는 판단이다. 판결문은 단호했다. 노숙인을 쫓아낸 당사자들은 이번 일로 가슴을 쓸어 내렸겠지만 단속이 한층 강화될 일터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만도 아니다. 망설이던 문은 굳게 닫혔고, 법의 명령으로 인간 청소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구제역 살처분의 시대, 낭떠러지에 선 노숙인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공무원이 겹쳐진다. 아직 바람이 매서운 늦은 밤이면 지하철 타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죽였을 것 아닌가.
무죄 판결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노숙인 쉼터나 빈곤 계층의 지원 등 복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요원해 보인다. 현 정부 들어 복지 예산은 해마다 삭감되거나 대상자를 줄이는 등 찬밥 신세니 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복지로 풀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하마터면 살인극이 될 뻔 했다. 한겨울 대리석 바닥 위에서 얼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큰 부상이 있었다는 건 인지하지 못해 다행인 셈이 됐다. 법원 역시 '정당한 행위였'으므로 죄를 묻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지만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보니 싸늘하게 죽은 사람도 거기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남아있다.
연초부터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을 받지 못한 죽음을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 블로그 등 개인 공간에 명복을 빌고, 공적 공간에선 구조적 문제를 궁금해 했다.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과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고은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과 얘기 거리를 남겼다. 음원 수입 분배 방식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고, 열악하기만 한 영화 제작 현장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 예술인 공제 조합에 관한 논의와 함께 예술인 복지지원 관련법이 발의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숙인과 두 예술인의 죽음은 자본주의의 필요 조건인 빈곤 계층이었다는 점, 그들의 위한 안전망이 너무 헐거웠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하루에도 4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곳에서 방치된 죽음을 맞고 있다. 죽게 한 사람은 없다고 판결한 법원은 거기까지다. 이는 사회적 살인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빈소의 풍경이다. 죽음에 대한 반응들. 한 쪽은 지켜주지 못해,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해서 문제이고, 한 쪽은 죽어서, 하필 얼어 죽을 뻔해서 애꿎은 누군가가 법원에 간 문제였다. 창작 활동에 대한 빈부의 문제, 다양성과 예술 전반의 위기에 대해 경고하는 목소리는 커진 반면, 노숙인은 ‘처리’에 대한 고민만 남아있다.
애초부터 죽어있던 삶, 노숙인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 (중략) ...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 - 조지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중.
계급을 냄새로 구분하고, 마음 속 깊은 혐오가 각인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인용한 까닭은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차별과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세태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표현한 ‘아랫것들’은 노숙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노숙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늘 자리가 비좁은 객실엔 취객의 토사물과 역한 냄새를 풍기며 잠든 노숙인이 있다. 그리고 넓게 물러난 사람들. 한 아이가 신기한 듯 노숙인에게 접근하고 부모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지하는 상황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라고 표현한 조지 오웰의 글이 떠오르던 순간이다. 여기서 ‘냄새’라는 공포가 작동한다. 비염,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연인이 등장하는 영화 <척추 측만Love in the Time of Allergy> 에서도 이 같은 맥락을 읽을 수 있는데, 아토피라는 시각적인 문제를 두고 냄새에 집착하거나 상처받는 장면들이 쉽게 지나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숙인은 그런 존재다. 김사이의 시 『카타콤베』에서 묘사한 '웅크린 돌덩어리들. 아니, 인기척을 내는 소름 확 끼치는 거대한 짐승들'같은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숨진 채 발견된 어느 노숙인은 애초부터 죽어있는 삶이었다.
무고한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과 같다.
앞선 일화에서 주목할 건 아이들이다. 토사물과 노숙인이 동일한 후각적 공포로 각인된 아이들에게 인권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에게 인권은 정상성, 즉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에게 한정해 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의 죽음에 대해 이 사회가 보여준 해결 방식은 인권보다는 수습에 가까웠다. 누군가 토사물을 치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순간만큼이나 주검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노숙인으로부터 각인된 후각적 이미지는 경쟁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거라는 공포로 전도되어 온 사회에 퍼져 있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모두는 노숙을 하는 사회다. 빈곤과 취향,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민족과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죽음을 선고 받는다. 빈소도 없이 매장되는 현장을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다. 어느 노숙인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은 이 시대의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무고한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과 같다’는 코란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최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