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th 전주국제영화제, JPP 다큐멘터리 피칭 참관기
올해 3회를 맞은 전주 프로젝트 마켓은 3개 부문 총 16편이 발표되었다. 참신한 기획의 저예산 디지털 극영화를 발굴하는 ‘프로듀서 피칭’, 개봉을 목표로 하는 HD 독립 다큐를 지원할 ‘다큐멘터리 피칭’, 현재 제작중인 독립영화의 최종 완성에 힘을 실어줄 ‘위크 인 프로그레스’ 가 2011년 4월 30일, 5월 1일 양일간 펼쳐졌다. 제작, 투자사에게는 기획이 돋보이는 영화에 참여할 기회이자, 감독에게는 영화를 완성할 지원군을 얻는 자리를, 또한 영화제 관계자들에게는 처음 선 보이는 영화의 떨림과 각오를 체험할 수 있었던 귀한 자리에 네오이마주도 함께 했다. 필자에겐 ‘큐시트를 잡은 감독의 떠는 손’, ‘트레일러만으로도 눈물을 훔치던 관객’으로 기억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 가장 긴급한 희망과 곧 사라질지 모르는 아픔의 기록, ‘다큐멘터리 피칭’ 에 다녀왔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프로듀서 피칭’에 이어 진행된 ‘다큐멘터리 피칭’은 총 7편이 발표되었다. 특히 올해의 발표작들은 최종 본선에 오른 감독의 이름만으로 이미 기대되는 자리였다.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 <경계도시1,2>의 홍형숙 감독, <작별>을 시작으로 휴머니즘을 뛰어넘는 생태적 감수성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황윤 감독 등 한국 독립 다큐의 장인들이 신작을 들고 나왔고, 축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다큐의 힘을 보여준 <비상>의 임유철 감독, 개봉을 앞두고 있는 화제작 <종로의 기적> 김일란 PD 등 참신한 기획으로 무장한 후배들이 새로운 영화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지지 않을 대선배, ‘거침없는 말빨’로 익히 알려진 변영주 감독의 진행은 다소 어두운 소재와 선후배 감독간 경쟁이라는 무거운 무대를 멋지게 지휘했다. 자. 이제부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2012 출사표를 들여다보자.
#1 <내일도 꼭, 엉클조 Here Comes Uncle JOE>
최우영 감독과 하시내 감독/프로듀서의 공동 피칭으로 소개된 영화는 경상북도 안동 임동면의 열다섯 오지(汚池)를 다니며 물건을 배달하는 방물장수 조병기씨의 이야기다. “못 가는 길이 없는 세상에서 오지란 가진 것 없고 찾는 이 없는 독거노인이 사는 곳”이라는 조씨의 소회를 시작으로 15년 간 계속된 노인들과의 인연과 (자살이 대부분이라는) 이별을 기록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물건을 파는 일보다 안부를 묻거나 형광등을 갈아주는 일이 더 많은 조씨. 힘들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한 영화를 제작하는 의미라는 감독의 말이 잔잔한 감동을 전해왔다. ‘KBS 인간극장의 구성과 유사한 휴먼 다큐멘터리’라는 상투적인 기록물에 그치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와 커뮤니티를 활용, 제2, 제3의 조병기가 전국의 격오지를 연결하는 사업을 동시에 기획하는 역동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2 <잡식동물의 딜레마 The Omnivore’s Dilemma>
2001년<작별>, 2004년<침묵의 숲>, 2008년<어느 날 그 길에서>로 대표되는 ‘야생동물 3부작’으로 주목 받은 황윤 감독이 신작을 들고 나왔다. 동물원 철창에 갇힌 동물, 몸보신을 위해 수렵되거나 인간이 만든 길에서 횡사하는 생명 등 사라져 가는 야생동물의 흔적을 담았던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는 식용으로 사육되는 가축, 돼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살처분’ 이라는 이름으로 350만의 소와 돼지가 파묻히고, ‘조류독감’으로 희생된 닭까지 1000만의 생명이 산채로 매장된 2011년. 유사이래 가장 많은 생명을 학살한 시대에 감독은 “야생동물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눈이 가서 닿았다”는 말로 연출의도를 대신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까지 명명된 구제역 사태를 바라볼 황윤 감독의 신작은 등장 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공장식 축사에서 태어난 아기돼지 ‘돈오’와 동물 복지형 농장에서 태어난 ‘돈수’의 성장과 일상을 비교해 보여 줄 예정이며, 감독의 가족이 돈오, 돈수를 만나면서 매일 밥상에 올라오던 고기반찬에 대해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돼지, 사랑할까 먹을까?’ 라는 카피와 함께, 기존의 인간 중심적 환경 다큐와 차별된 시선을 보여줬던 황윤 감독의 새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3 <누구에게나 찬란한 on Your Feet>
"2007년 독립영화 최대 관객 10만이라는 <우리 학교>가 3개월 뒤에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았다면 당시 최대 흥행작으로 남았을 <비상>의 감독,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한바탕 웃음으로 시작된 세 번째 피칭은 또 다시 축구이야기를 들고 나온 임유철 감독의 새 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이다. 리그 꼴찌, 가난한 시민구단 인천유나이티드의 도전을 담았던 전작 <비상>에 이은 이번 영화는 경남지역 고아원 대표팀의 유소년 전국대회 도전기다. 임유철 감독은 “19세가 되면 시설을 떠나 독립을 해야 하지만 지원이라고는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할 500만원. 대가 없이 주어지는 온정에 길들여지고, 패배는 습관이 되어 버린 아이들에게 축구는 스포츠 이상의 가치”임을 힘있게 말하고는, 트레일러를 선보였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의 묵직한 주제들 속에서 스포츠라는 소재가 다소 가벼울 수 있다는 선입견을 깨고, 단 10여분의 영상을 지켜보던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보였다. 매번 큰 스코어로 패배하던 아이들이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지난해 준우승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과정, 하지만 오직 돈이 목적인 복지 시설장들의 반대로 팀 해체, 그리고 극적으로 경남 FC 구단주가 유소년클럽으로 받아들여 다시 부활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진부한 소재임에도 축구 감독 박철우의 교육철학이 전하는 감동과 서비스가 되어버린 복지시스템의 한계를 꼬집는 감독의 시선이 만만치 않다. 카메라는 다시 뛰는 소년들의 곁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4 <그리고 싶은 것 What I Want To Draw>
“내가 20세기에 담지 못한 것들을 말해주는 후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변영주 감독은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사회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네 번째 피칭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권효 감독의 <그리고 싶은 것>이다. ‘20세기에 담지 못한 이야기’라는 소개가 흥미롭다. 영화의 주인공은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다. 아이들이 읽을 그램책을 만드는 작가가 그리는 ‘위안부’,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권윤덕의 그림책이 새삼 역사의 도마에 오른 이야기다. 일본 출판관계자는 소재와 관점, 그림체까지 적절하지 않다고 난색을 표하는 한편, 욱일승천기와 괴물로 형상화된 일본군, 벗꽃으로 상징화된 위안부를 모두 지우고 제비꽃으로 바꿔버린 작가의 의도를 놓고 한국의 작가들이 논쟁에 휩싸인다. 아이들에게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와 원망을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회의와 표류하는 그림책 사이에서 평화를 고민하는 영화는 21세기의 위안부를 다시 불러온다. “우리도 베트남에서 똑같이 했어요. 콩고에서, 보스니아에서, 이라크, 시리아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아이들 앞에 선 권윤덕 작가가 던진 ‘평화’라는 질문이 그 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5 <춤추는 숲 Every Sour Sweet Day>
도시에 ‘마을’이 존재 할 수 있을까. 아파트에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는 무슨무슨 마을이 아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재활용센터를 운영하며 나눠 쓰고, 대안학교를 세워 온 마을이 아이 하나를 키우고, 마을 잔치엔 직접 키우고 만든 유기농 먹거리가 올라오는 동네가 있다. 주민들이 만든 소극장과 영화관, 라디오 방송국에선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의 작품이 공연된다. 그 곳에선 모두가 동네에서 놀고, 살아간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에 위치한 ‘성미산 마을’이다. <경계도시1,2>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큰 획을 그은 홍형숙 감독이 들고 나온 새 영화라는 데서 이미 주목 받고 있는 <춤추는 숲>은 실제 감독이 살고 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이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정착한 곳. 하지만 홍익재단이 소유한 땅, 명품 사립학교 설립계획으로 철거 위기를 맞아 ‘놀던 사람’들이 ‘투쟁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성미산이라는 아름다운 숲과 대안적 도시 공동체를 사수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투쟁 기록물이라는 다소 딱딱한 소재를 ‘유쾌한 마을 사람들의 항쟁기’로 그려낼 장인의 솜씨가 어떤 영화로 탄생할 지 기다려지는 작품이다.
#6 <노라노의 집 House Of Nora Noh>
84살의 패션디자이너, 미니스커트와 패션쇼를 처음 한국에 소개했다는 노라노는 스타들의 의상을 담당했던 1세대 코디네이터가 아닌 억눌린 여성을 응원하는 존재였다. 노라노 의상실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으면 ‘공순이’, ‘부엌데기’가 아니라 당당한 여성이 될 것만 같았던 그 시절. 김성희 감독의 <노라노의 집>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의 이야기다. 피칭주자로 나섰던 김일란 프로듀서는 6월 개봉 예정인 <종로의 기적>에서도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혁상 감독 역시 <노라노의 집> 촬영을 도운 바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언이 노라노의 수의를 입는 것이라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생애 마지막 패션쇼. ‘노라노 의상실을 아십니까’라는 단출한 광고를 통해, 격동의 50-60년대를 함께 했던 백발의 할머니들을 불러모은 그들만의 패션쇼는 영화와 함께 준비되고 있다. 잊혀진 옛 얘기에 멋진 옷을 입히겠다는 기획이 참신하다. 무겁고 진지한 독립영화라는 편견을 깨고 당당하게 런웨이 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7 <말로 야마이 Malo-Yamayi >
갖은 고생으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아프리카 여행, 김정인 감독은 그 곳을 소회하면서 “풀 쪼가리 하나도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말로 야마이>는 잠비아의 뭄브와 지역에 위치한 룬고베 보건소를 중심으로, 매시간 죽어가는 아이와 산모를 목격하는 동시에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 담는다. 아프리카를 다녀간 카메라들이 그 곳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동정의 대상으로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서너 시간을 걸어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느라 하루가 짧은 보건소의 사람들과 생명을 끌어안는 어머니, 여성을 비출 것이라는 기획의도를 전했다. 한편으로, 타 국가들의 구호에 의존하는 잠비아 사람들과 사실상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식민상태가 된 정치 상황도 언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산적한 국내 이슈들 가운데 먼 나라의 이야기가 얼마나 관객의 호응을 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기존의 아프리카(또는 세계 오지 속) 다큐와 차별화 하기 위해서는 타자화되는 카메라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 과제로 보인다.
‘피칭의 꽃’이라는 다큐멘터리 부문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과 사건의 무게만으로 충분히 고무적인 행사지만, 영화의 성공보다 영화가 지켜보는 존재와 가치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에 더 큰 감동을 전해준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이 사람들과 이 장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도전과 투쟁을 지지해 달라는 감독의 외침은 한결 같았다. 다음날 2일 발표된 심사결과는 최우영/하시내 감독의 <내일도 꼭, 엉클조>와 홍형숙/강석필 감독의 <춤추는 숲>이 공동대상을, 기획개발상은 황윤 감독의 <잡식동물의 딜레마>, 관객상은 임유철 감독의 <누구에게나 찬란한>이 수상했다. 비록 지원금을 받지 못한 영화가 결정되었지만 본선 진출작 7편의 피칭은 어떤 연설보다 힘있는 호소력을 보여줬고, 10여분에 불과한 트레일러는 이미 완성된 어떤 영화보다도 큰 울림으로 기억되었다. 다시 신발끈을 조이는 독립영화의 저력을 응원하며 2012년, 이 영화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최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