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종필의 6개 씬
# 이 글은 비평 전문지, 제47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 송고된 글입니다.
[감독론] 박종필의 6개 씬
2017년 7월 28일. 박종필 감독이 생을 마감했다. 데뷔작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1998)를 작업한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최근까지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을 총괄하고, 그 중 <인양>(2016)과 <잠수사>(2017)를 연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그였다. 박종필은 방송과 스크린을 통해 약 40여 편의 다큐멘터리 작품을 연출하고 수많은 작품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투쟁 현장과 인물, 이슈를 알리는 다수의 영상을 남겼다. <잠수사>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
박종필의 영화는 예고 없이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던 노숙인 형들은 인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고, 방치된 방 안에서 혹은 고립된 복지시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장애인도 그러했다. 어떤 이들은 영화 속에서만 살아있다. 설명하지 못할 이유로 떠나간 장애인 활동가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누군가. 영화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충만한 생기(生起)를 담았지만 떠날 운명까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예고 없이 떠난 사람들이 박종필의 영화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들에게 박종필 감독의 작업은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미리 쓰는 오비추어리였다.
그들을 대신해 쓰기로 한다. 영화 감독 박종필의 늦은 오비추어리. 혹은 ‘박종필’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이 메모들은 작가로서의 박종필뿐 아니라 활동가였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다.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그를 기억해야 하는 6개의 장면을 정리했다.
#1 박종필의 빈소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빈소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가 영화감독으로 살아온 시간만큼, 그들도 제법 나이가 든 모습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다. 고마웠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흔한 인사가 선명하게 의식되었다. 박종필 감독은 세월호 유가족에게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을 부탁했다. 참사를 기록하다가 몸이 상했다는 죄책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미안합니다. 떠난 자가 선점해버린 명징한 인사였다.
그가 떠난 날 빈소의 풍경은 여느 이슈에 대응하는 상황실에 가까웠다. 그가 남긴 것을 정리하고 추모 행사의 이름을 짓는 일들이 준비되었다. 그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현장. 상기된 얼굴로 할 일을 찾고 있는 동료들. 어쩌자고 번듯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친구들이 한 명도 없느냐는 농담.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익숙해서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익숙하다는 것은 의식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의 영화들을 떠올렸다. 고함소리. 땀 냄새. 영화적 체험보다는 거친 현장이 반사적으로 감각되었다.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현장을 기록했던 박종필 감독의 영화는 저널에 가까웠다. IMF, 노숙인, 에바다 사태, 장애인 이동권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와 유의미한 투쟁을 전달하기 위해 영화는 시의적으로 제 역할을 해 주었고 대중을 설득했다. 그리고는 잊혀졌다. 최소한 (영화인들에게, 아니 내게) 영화감독으로서 박종필은 투쟁의 연장선에서 의식되고 잊히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활동가라고 소개했다.
빈소 한쪽에 작은 상영관이 마련되었다. 감독의 생전 모습과 그가 작업한 영상이 반복해 흘렀다. 의자가 없는 상영관이었다.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빔프로젝트뿐이었다. 빈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분주했고 텅 빈 상영관에서 스크린과 빔프로젝트가 빛을 밝히고 있었다. 박종필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그 공간에서 영화감독이자 미디어활동가였던 박종필의 두 개의 직함이 지나치게 밝은 빛을 겨루고 있었다.
#2 종구의 방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에 거리가 없는 건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한 삶의 변화가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자신도 모르게 지워버렸을 것이다. 장애가 있거나 홈리스인 동료들이 그의 카메라를 박종필처럼 여겼던 건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통증과 질병을 겪는 몸을 기계인 카메라와 구분하지 않았던 건 비극이었다.
- 반다(전 다큐인 활동가), [ACT! 특별기획] 중.
<거리에서>(2007), 노숙인 종구와 인터뷰 중인 방 안. 인터뷰를 진행하던 감독이 갑자기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장면이 있다. 감독이 없는 빈방에서 종구 형은 홀로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한다. “제발 좀... 올바른 얘기를... 그대로 써주라. 뭘 알고나 있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사내가 카메라를 향해 혼잣말을 한다. 이때 화장실에 있던 감독이 나오면서 카메라와 종구 형만 존재했던 찰나는 사라진다. “무슨 얘기해요 형?” “나 얘하고 얘기하는 거야” “나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감독과 종구형의 짧은 대화가 끝나면 암전되는 이 장면. 이 짧은 순간은 박종필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인물과 감독의 친밀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전히 카메라만 마주한 상황에서 발화된 감정과 고백. 마치 카메라가 대화의 주체로 등장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박종필은 카메라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식이지만 불가피하게 감독이 드러날 법한 상황에서도 그는 숨어버리곤 한다. 그의 영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뷰 씬에서, 질문하는 감독의 목소리조차 생략되어 있거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그런 그가 카메라 앞에 전신을 드러낸 유일한 장면이 있다.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에서 노숙인들과 어울려 등 목욕을 하는 장면인데, 노숙인들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전달하는 의도라고 보기엔 조금 이상하다. 수줍게 웃는 감독의 얼굴은 형들이 아닌 카메라를 향하고 있고, 노출된 하얀 상반신 피부는 노숙인들의 그것과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메이킹 필름에나 사용할 법한 장면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소 쑥스러운 모양새의 감독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서소문 공원 수돗가의 노숙인들이 형처럼 느껴졌다. 서툴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감독의 모습을 보면서 낯선 그들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감독은 인물과 카메라(혹은 감독)의 거리가 밀착될수록 선정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인터뷰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중에 하나라는 노숙인들과의 작업에서, 오히려 그들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모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감독은 이 장면을 포기하지 않고 후속작 <거리에서>에 재사용했다.
다시 종구 형의 방 안. 앞서 언급한 씬은 감독과 종구가 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로 연결된다. 나도 인간이라고. 술만 먹고 엎어져 나쁜짓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내 얘기 좀 제대로 찍어줘. 불 꺼진 방, 검은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호소와 눈물이 잦아지면 비로소 제목, ‘거리에서’ 가 등장한다. 종구형과 박종필, 카메라의 대화는 앞서 인용한 반다(전 다큐인 활동가)의 글에서 밝힌 ‘박종필의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라에 말을 걸었던 종구형은 동료였던 ‘종필이’보다 카메라를 더 의지했던 걸까.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카메라에게 마음을 연 뒤 속내를 털어놓는 기묘한 인터뷰는 이 영화의 첫 씬에 배치되었다.
#3 지하철 장애인 리프트
장애인 리프트의 움직임을 앙각으로 촬영한 약 3분 여 간의 롱테이크 씬. 수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혼자 리프트에 탑승한 뒤 계단을 오르는 이 장면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2002)에 쓰였다. 리프트가 천천히 상승하는 동안 비장애인 몇몇이 계단 한 쪽으로 오르거나 내리면서 구경을 하는 일 외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답답함을 의도했다. 리프트의 느린 속도를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리프트가 화면 위쪽으로 빠져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빈 계단의 전경을 약 30초간 지속해 촬영했다. 계단 위 공간을 프레임 밖에 배치함으로써 휠체어 장애인을 태운 리프트가 계단 위까지 오르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관객은 갇힌 프레임 안에서 리프트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사운드를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조악한 음향 장치에서 끝도 없이 재생되는 멜로디를 더딘 시간과 함께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이용할 때의 수치심과 스트레스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된 설정 쇼트로 박종필 감독의 영화적 작업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씬의 현장 사운드는 뮤지션 클론의 음반 victory 중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에 그대로 샘플링되어 수록되었고, 또한 국가인권위 제작 옴니버스 영화 <여섯개의 시선>(2003)에서 여균동 감독은 이 장면을 모티브로 <대륙횡단>을 작업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에서 이 장면의시간은 유독 멈춰있다. 투쟁 보고서라는 제목답게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배경과 과정을 전달하기 위해 내 달리던 영화가 잠시 숨을 돌리는 것 같은 시간. 멈춰놓은 3분 여 동안, 지하철 계단 아래 카메라를 세워놓은 그를 상상했다. 텅 빈 계단과 뷰파인더를 몇 번이고 번갈아보며 이 낯선 장면이 가지는 의미에 공을 들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부여잡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패밀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노들바람>(2004)에서 이 리프트 씬을 또 보게 되었다. 박종필의 영화는 반복적으로 쓰이는 영상이 많다. 다른 작품에 재사용되는 영상들. 위 장면을 포함해 각종 투쟁 영상, 관련 이슈에 대한 보도 영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전 작품에서 사용한 영상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감독에게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새로울 것 없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대중에게 알리고 강조하고 또 알려야 하는 것이 박종필의 연출 의도라는 점에서 수없이 망설였을 그의 흔적이 또한 거기 있었다.
# 4 페르소나, 박경석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는 내가 찾아 헤매는 천국이, 죽음 저편 구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장애인운동의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공간에서, 세월호의 ‘망각과 기억’ 속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기록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박종필의 카메라이고 다큐였습니다. 그래서 박종필 감독은, 내게 금관 예수입니다.”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 교장) 추도사 중.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 인권 운동에 한 생을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장애 문제에 대해 작품 활동뿐 아니라 장애인미디어교육, 장애인기자학교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애초에는 노동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뭔가 ‘다른’ 노동을 이야기하고 싶어 장애인을 떠올렸고, 그렇게 찾아다니다 에바다 투쟁에 결합하게 됐다. 주류 미디어가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달랐던 에바다 현장에서 경험한 충격과 분노는, 장애 쪽만 벌써 7년째 활동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박종필 감독은 오랫동안 해왔던 노동 운동에 대한 고민을 장애인 권리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고민은 <장애인도 노동자다>(2005)에서 잘 나타나는데, 특히 김도현(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의 인터뷰에서 노동 운동과 장애가 어떻게 결합하고 구체화하는지 보여준다. “산업 혁명 이후 기계의 발명으로, 속도가 느린 장애인은 배제되고 차별이 당연시 되어졌다. (중략) 또한 예전에는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감당할 수준의 노동과 대가를 분배했지만 노동이 상품이 되면서 노동을 팔 수 없는 장애인들은 가치가 없는 존재로 배제되었다. 노동은 자본에게 이용되는 조건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이 노동이어야 한다. 그런 노동이 인정받는 싸움을 해야 한다”
감독은 두 번째 작품 <끝없는 싸움-에바다>(1999) 이후 장애와 관련된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영화마다 장애인 야간학교 교장 박경석을 등장시킨다. 장애인이동권, 차별금지법, 장애인시설 인권문제 등 장애계의 절박한 요구를 담은 작품에서 박경석은 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에 위치한다. 휠체어를 타고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연설을 하거나 경찰이나 담당 공무원에게 진압되어 끌려나가는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박경석의 모습은 박종필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박경석의 오디오를 끊지 않고 집회 참가자들의 표정이나 투쟁 현장의 영상 위로 흐르게 하는 방식을 사용해 거칠게 충돌하는 현장을 전달하면서도 서사성을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 박경석은 박종필에게 가장 중요한 신념이었던 장애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이자 페르소나였다.
영화 속 박경석은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어떤 상황에 서도 흔들리지 않는 투사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박종필의 빈소에서 보았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구겨져 있었다. 박경석은 지난 25여 년 동안 수많은 동료을 먼저 보냈다. 장애인들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빈곤으로 너무 일찍 떠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싸움의 최전선에 섰던 그가 휠체어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박종필은 유작이 되어버린 세월호 작업이 끝나면 박경석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박경석의 15년이 담긴 영상이 보관되어 있다.
#5 지하보도의 노숙인과 경찰
지하철 선로에서 눕고, 목에 쇠사슬을 매고, 농성현장에서 경찰에 매 맞는 중증장애인들 곁에서 박종필의 카메라는 놀랍도록 우직했다.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또 하나의 작가적 고민이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그로 인해, 장애인들의 역사적 투쟁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는 험한 세상에 흩어지지 않는 말이 되어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ACT! 특별기획] 중.
그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순간이있다.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에서 경찰이 지하 보도에 누워있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불심 검문을 하던 장면이다. 불심검문은 무작위로 이름을 묻고 범죄 여부를 추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불심검문을 폭력적으로 집행하는 경찰을 향해 크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린다. “반말 쓰지 말라구요!” 카메라가 세차게 흔들렸다. 갑작스럽게 소리친 사람은 노숙인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박종필 감독이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항의를 했던 까닭이 불심검문에 대한 불법 여부도 폭력도 아닌 반말이었던 것이다.
박종필의 영화는 시스템을 고발하고 투쟁을 지원하는 미디어 운동의 전형처럼 생각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시적인 싸움 안에 방치된 인간,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연민에 가깝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박종필 감독은 1999년 <끝없는싸움-에바다>를 통해 에바다 사태를 알리고, 3년이 지난 <에바다 투쟁 6년 – 해 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에서는 원장을 비호하며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시설생활인 아이들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 버스를타자!>를 발표한 2년 뒤, 장애인 야간 학교를 배경으로 한 <노들바람>에서는 검정고시를 앞두고 이동권 투쟁에 참여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투쟁 일정으로 수업이 무산된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며 운동 사회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는다. 또한 1998년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에서 IMF 이후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들의 사회적 문제를 짚었다면, 8년이 지난 <거리에서>는 인물에 밀착해 그들의 사연에 집중했다. 이 작품들은 시간을 엇갈리며 발표되었다. 감독은 다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전 작품에 대한 후속작을 끊임없이 준비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후속작은 어김없이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6 강릉의 요양원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강원도 강릉의 한 요양원.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문지성의 아버지가 그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져 누구도 면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6시간이 넘도록 돌아가지도 못하고 차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불러들인 건 박종필 감독이었다. 평소 독특했던 자동차 엔진 소리가 창문을 통과해 그의 귀에 닿은 것이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문지성의 아버지는 박종필 감독의 가족에게 그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소개하며 오열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다시 밀려왔다.
박종필 감독에게 세월호는 영화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사건이다. 박종필은 어느 해부터 그가 소속되어 있던 다큐인의 후배들에게 슬럼프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더 바쁘게 작업을 하고 돈을 벌어도 해소되지 않는 문제였다. 생활 패턴을 바꾸고, 활동가를 재생산하기 위해 조직의 시스템도 바꿔봤지만 슬럼프는 극복되지 않았다. 세월호를 만나기 전까지.” 다큐인에서, 세월호 부표가 손에 잡힐 것 같은 동거차도 그리고 요양원과 빈소에서 박종필 감독과 여정을 함께 했던 송윤혁 감독은 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우연한 기회에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보다 역동적이었다. 슬럼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다큐인은 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서운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인양>(2016)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갑작스런 김관홍 잠수사의 죽음. 이미 많이 지쳐있던 감독은 다시 짐을 싸고 <잠수사>(2017)의 작업에 들어갔다. <잠수사>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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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필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분노와 무력감이 남는다. 한국사회의 차가운 민낯에 온몸이 얼어붙고 미학은 영화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 지면에 박종필 작가론을 쓰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그가 작가인지 활동가인지 질문하고 있었다. 비평은 게을렀고 평자로서는 한계를 드러낸 고백이다. 20년 전 데뷔작을 낸 뒤 급변한 제작 환경, 열악한 여건 속에서 분투했던 감독의 고민이기도 했을 영화감독과 미디어활동가의 거리에 대해, 우리가 그토록 부여잡고 있는 ‘영화’에 대해 내내 질문하고 흔들렸다.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시작한 글이 감당하지 못할 고민을 열어놓고 말았다.
무력감과 분노가 저울질 할 때마다 카메라를 들었던 그는 이제 없다. 거칠고 흔들리는 영상의 수많은 클립을 한참이고 매만졌을 그의 노고와 반짝이는 순간들을 발견할 때마다 박종필의 영화로 들어가는 문 앞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 작가의 작업이 영화의 구조를 쌓아 올리기 전에, 영화가 어떻게 호흡하고 활보한 끝에 아름다움을 얻었는가를 묻기 전에 해야하는 질문. 영화를 왜 하는가. 그의 영화를 빠져나오면서 말할 수 없이 고요한 그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최성규 (한독협 비평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