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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산 개척단

몽상(최성규) 2024. 10. 30. 09:56

# 이 글은 비평 전문지, 제48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 송고된 글입니다.

 


[
작품론_서산 개척단]

 

 

야만의 시대이야기꾼을 향한 청원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있는 녹슨 문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서산개척단>을 보는 동안 끔찍한 폭력의 역사를 온전히 떠올렸다. 1961년 사회명랑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납치해 대규모 간척사업에 동원했던 사건, 대한청소년개척단이 세상에 알려졌다. 박정희판 군함도로 명명된 해당 사건은 이 지면에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산개척단> 57년간 봉인된 국가 폭력과 기만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했다. 사건을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침묵하던 피해 당사자들이 거리로 나서는 과정까지 담아내 큰 울림을 주었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 못했지만 영화제와 평단의 고른 지지와 사회적 공분을 만들어냈다. 또한 영화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언론은 ‘부랑아, 건달, 윤락 여성이 아닌 사람도 납치’ 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특정해 자극적인 뉴스를 생산하는 반면,  <서산개척단>은 건달 출신의 감시반, 중간 관리자 등 개척단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의 증언과 감정을 담아낸다. 물리적 폭력으로 구별되는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하나의 거대한 피해자 집단으로 재구성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국가 폭력을 겨냥해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시점의 선택은 용산 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과 더불어 이야기 해볼 수 있으며 지난해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를 정리할 때 이 작품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화의 성과는 적지 않다.

 

하지만 내내 마음에 걸린 어떤 장면에 대해 말할 생각이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영화를 잠식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대한청소년개척단 사건을 재현한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의 공연 실황과 이를 관람하고 있는 피해 당사자들의 신체반응이 교차되는 시퀀스다. <서산개척단>은 사건을 모티브로 공연된 연극을 활용했다. 해당 장면은 피해 당사자들이 연극을 지켜보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극중 구타를 당하는 노동자들의 모습(또는 사운드)과 힘겹게 이를 지켜보는 피해자들의 신체 반응이 스펙터클하게 대비된다. 이 장면에 대한 인상이 표현된 글1) 이 있다. 여기서 이상한 지점이 탄생한다. (중략) 마치 피해자를 때리는 듯 재현된 이 몽타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단순히 윤리의 차원으로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게 지금의 판단이다’. 인디즈 리뷰는 관객의 입장에서 독립영화를 발 빠르게 소개하는 지면이다. 매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종우는 이 장면을 언급하고 판단을 유보했다. 장면을 마주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필자 역시 해당 장면을 두고 오랜 시간 머뭇거렸다.  이 장면의 불편함을 언급하는 것이 영화의 성과에 비교될 만한 작업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조훈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 현장감 있게 보여주는 방식은 재연일 텐데 (중략) 그건 위험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중략) 연극을 찾아냈고, “어르신 네댓 명이 연극을 보시면서 눈물을 많이 훔치셨다. (중략) 이후 TV를 가지고 서산에 내려가 연극을 보지 못한 어르신들께 보여드렸더니 그들의 얼굴이 다큐멘터리와 관객을 연결해주는 최고의 다리가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장면은 영화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감독은 그들을 초대해 연극을 재생한 뒤 극중 구타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선별했다. 프레임에서 벗어날 정도로 최대한 가까이 그들의 얼굴과 몸짓을 담았다. 강하게 개입해 얻어낸 장면이 과연 관객과 다큐멘터리를 긍정적으로 연결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필자를 포함해 일부 관객에게는 그 의도가 닿지 못한 것 같다. 마치 피해자를 때리는 것처럼 오독된 시퀀스. 과거가 재현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거나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는 얼굴들, 깊은 주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경련과 호흡, 연신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고쳐 앉는 집단적인 몸짓은 그저 이 시간을 견디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숨죽인 공간에서 침묵을 대신하는 건 무대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소리였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한 평가는 피해 당사자에게 물어야 하며,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힘을 쏟는 편이 낫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도 일견 동의할 수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서산개척단>의 성과는 미해결 된 사건의 출발점이자 과정이므로 해당 장면의 논란이 이 영화의 걸음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덧붙여야 한다면 이런 말도 인용할 수 있다. 비극을 재현한 수많은 예술은 대부분 실패를 반복해왔다, 는 오래된 명제. 실제의 사건을 재현하는 작업은 그만큼 어렵고 신중해야 한다는 선언인 동시에 변호의 의미로 회자되는 문구일 것이다. 그렇다면 글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시작된 어떤 상상이 글을 이끌었다. 상상이 비극으로 전개되는 순간 더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마음에 걸린 어떤 장면이 영화를 잠식하다가 위험한 상상에 이른 것이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영상이 있다. 영화의 장면은 아니다. 평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 것 같은 노구의 사내가 담담하게 말을 하다 목이 멘다. 검은 얼굴의 주름이 깊게 팬다. 아이처럼 숨을 몰아가며 빈 축사를 어루만지며 울고 있다. 소가 죽었다. 350만의 소와 돼지, 조류독감으로 희생된 닭까지 1000만의 생명이 살처분된 2011년 구제역.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생명이 학살된 사건의 취재 영상 중 하나다. 필자에게 이 영상은 구제역 사태를 다룬 어떤 장면보다 강렬하게 기억된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산채로 매장되는 동물들의 영상보다 마른땅처럼 서 있던 사내가 흐느끼는 이미지가 더 깊은 슬픔으로 각인된 것이다.

 

<서산개척단>의 도입부는 이러한 정서를 충분히 활용한다. 인터뷰를 꺼리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앳된 얼굴이 담긴 낡은 사진, 간척지가 기록된 마이크로필름 속 지도와 2013년 충남 서산의 고요한 풍경을 유영하던 영화는 미스테리한 사건의 입구로 안내한다. 개척단의 소대장이었던 정영철이 등장하고 상기된 채 동료의 죽음을 증언하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이때 영화가 중단된다. “내가 이 이야기만 하면...” 감정에 북받친 정영철이 고개를 떨군 순간 영화도 멈춘 것이다. 암전된 화면이 이어지다가 뒤늦게 제목이 등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서산개척단>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 노쇠했지만 돌덩이 같은 사내의 눈물. 어떤 언어도 닿지 못한 슬픔이 검은 화면 위로 떠 있는 듯하다. 이 인터뷰는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영화가 할 말을 마쳐가는 즈음 비로소 정영철의 말이 완성된다. 내가 이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터져. 영화는 두 개의 문장 사이에 있다.

 

영화가 주목한 또 하나의 눈물이 있다. 서산개척단의 중간 관리자였던 이상범의 눈물. 이상범은 스스로 건달처럼 살다가 서산에 내려와 불량 청소년을 계도했다고 증언한다. 통제를 위해 어느 정도의 구타는 불가피했고 좀 그랬다” “인정한다 며 너털웃음을 짓던 그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오열한다. 영화가 이 눈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낡은 집에서 서툰 몸짓으로 라면을 끓이는 그의 뒷모습은 하염없이 초라하다. 가해자였던 이상범 역시 국가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암시하는 쇼트일 것이다. 이상범은 희생자의 죽음을 부인하다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하던 카메라는 물러났다가(줌아웃) 다가가고(줌인), 포커스마저 포기한 채 한껏 다가가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을 잡아내고야 만다.

 

사내들의 눈물. 이 영화가 욕망하는 것 중 하나다. 영화가 비극을 통과한 이들의 눈물을 욕망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사내들의 눈물이 전면에 세워지는 동안 중요한 사실이 밀려났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서산개척단>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강제 결혼을 앞둔, 이른바 대기부녀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척단에서는 결혼이 강제로 이뤄졌다. 여성들은 내부적으로 일종의 위안부 역할을 요구받고 밖으로는 깡패-매춘여성의 갱생으로 홍보되었다. 당시 결혼 대기의 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때를 가리지 않는 성폭행에 노출되어 있었다. 일본군 위안소에서나 벌어졌을 법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2) 영화는 푸티지와 인터뷰를 통해 강제 결혼에 대해 소개하고 있지만 성적 범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감춰진 국가 폭력을 찾아 공개하고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섬세하게 살피던 영화가 성폭력에 찢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감독은 전작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2003), <킬로미터 제로, 2003 칸쿤 WTO 투쟁>(2003), <빅파이, 한국영화산업 나눠먹기>(2006), <블랙딜>(2014) 등 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주목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사건의 누락이 자본과 노동 착취에 집중한 기획의도에서 비롯된 판단인지 관심 밖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피해자의 눈물을 욕망한 영화가 어떤 비극보다 끔찍하게 각인될 트라우마를 잊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잊어버린 게 아니라 지워진 건 아닐까. 어쩌면 그녀들의 눈물이 사내들을 향해 있던 건 아닐까. 영화가 사내들의 눈물을 욕망한 나머지 끝내 그녀들을 지워버린 건 아닐까. 상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이 글은 오랜 시간 멈췄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그 이야기는 훼손되기 마련이라는 벤야민의 말. 이 글은 이야기가 훼손된 과정이다. 의도가 빗나간 장면에서 비롯된 상상이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비판적 지지를 의도한 글이 영화마저 훼손시키고 길을 잃었으니 명백한 실패다. 그럼에도 모순적인 수행을 꺼내놓는 이유는 잘못된 영화의 선택도 다른 무엇도 아니다. 통한의 눈물을 눈앞에서 흘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산개척단>이 세상에 나왔지만 여전히 침묵하는 시대를 살아갈 방법을 묻기 위해서다. 또한 <서산개척단>이라는 이야기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야만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공동체의 이야기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이 글은 필자로부터 훼손된 이야기가 그리고 영화가, 벤야민이 긍정한 공동체적 기억으로 살아남아 복원되기를 희망하는 간절한 청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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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종우,<서산개척단>: 번역물로서 다큐멘터리 영화 <<인디즈리뷰>>  2018/06/07
 

2)  해당 내용은 SBS 시사프로그램에서 보도되었다. <<그것이알고싶다>> 1113회, 2018/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