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멀 타운 (2010) ----------------------------------------------------------------------------------------
감독: 전규환



하루하루 막노동을 하며 철거예정지인 낡은 아파트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오성철은 일거리마저 끊겨 다른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지만 여의치 않다. 자신이 가진 성적장애와 강박증으로 인해 전자 발찌를 차고 욕구를 억누르며 살아가다 어렵게 택시운전을 하게 되지만 성철의 욕구는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9살 꼬마를 향해 있다.
오성철로부터 아이를 잃어 가정이 잔인하게 무너진 인쇄업자 김형도가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그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상처에 대한 복수심으로 오성철의 뒤를 밞게 되고 목을 메 자살하려는 오성철의 처절한 몸부림을 목격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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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 타운의 비상구
그는 최선을 다해 죽어가는 중이다. 그의 서식지도 곧 철거된다. 그는 발찌가 채워진 전과자, 임금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다. 사냥꾼이 그를 쫓고 있다. 수렵의 그물망이 숨통을 조여 온다. 하지만 그를 쫓는 사냥꾼의 목적은 포획이 아니다. 사냥꾼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풀어주어야 한다. 죽어지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분노가 끓고 있다. 거세된 욕망이 충돌하는 도시, 터지지 못한 채 곪아가는 환부가 뜨겁게 잠식하고 있다. 혐오와 환멸로 채워진 그곳은 애니멀 타운이라 명명되었다.
막노동으로 연명하는 오성철은 청소년 성범죄 전과자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영화가 설명하는 그의 이력은 ‘소아성애에 대한 치료와 보호감찰이 필요한 대상자’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형사의 노크에 응답해야 하고, 발목에 찬 전자발찌는 현재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또한, 약을 먹지 않으면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한겨울 건설현장에서 손을 불어가며 일한 임금은 체불되고, 모두가 떠난 아파트는 난방마저 끊긴 상태다. 그는 집을 비우라는 재촉에도, 임금을 못 받게 됐다는 일방적인 통보에도 머리를 조아린다.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의무적인 생존 활동이 하루를 채우고 있다. 또 한 명의 인물, 김형도는 어린 딸의 성폭력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아버지다. 그의 일상은 늘 수동적이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일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물러서는데 익숙하다. 가게가 어려우면 직원을 해고하고, 고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제품에 대해서도 ‘이번엔 그냥 쓰시고, 다음 번에는 잘’하겠다는 말로 빠져나간다. 그 와중에 눈은 여성 고객의 육체를 훔치고, 성적 욕구는 돈으로 사는 쪽을 선택한다.
영화의 카피 ‘아동성범죄자, 그리고 피해가족...’ 에서 공개된 두 인물의 관계에서 관객은 극단적인 갈등과 복수를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두 인물의 무기력을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 김형도가 오성철을 우연히 발견, 미행하는 장면에서 촉발한 긴장감은 어느새 소멸된다. 무기력한 둘 사이를 배회하는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는) 소녀가 있다. 성철을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형도가 유일하게 물러서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던져졌던 소녀. 그 소녀는 왜 그리 영롱하게 보이는 걸까. 과연 이 영화가 두 짐승의 싸움과 이를 둘러싼 사각의 링만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 부분이다.
앞서 게시된 조숙현 에디터의 비평 『저급 본능을 권하는 사회』가 들여다 본 <애니멀 타운>은 ‘본능을 숨기고 도시의 밑바닥을 유랑하는 온순한 짐승’인 성철과 ‘피해자이자 동시에 한 청춘의 죽음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해자’인 형도가 ‘세상과 조우하는 방식에 대해 관찰하고 있’는 영화이자, ‘평행한 경주를 벌’인 ‘두 남자의 감정이 각자의 비등점을 향해 (중략) 충돌’하면서 ‘인간의 짐승적인 속성을 결국은 폭발시키고야 마는 사회,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은 세상’이라고 전하는 환멸의 영화라고 서술한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일 뿐만 아니라 다소 거친 연출이 미처 전달하지 못한, 퍼즐 같은 영화를 빠져 나온 관객을 안내하는 빼어난 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화를 지배했던 건 무기력이다. 한없이 투명하게 보이던 그 소녀와 (어쩌면) 그녀를 쫓아다니는 것 같은 두 인물에 대한 이상한 여운. 순식간에 치닫으며 폭발해버린 영화가 끝나고 환멸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알 수 없는 갈증 같은 게 밀려왔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수많은 논란을 감수하고 가장 혐오스러울 소재를 만지작거리는 감독이 고심했을, 신과 짐승 사이의 경계에 대해서 말이다.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13세 이하 청소년 성)범죄. 또한 가난한 죄. 살인면허가 주어졌으나 오히려 사형대의 밧줄을 끊어버린 괴상한 집행과 내던져진 그리스도의 구원. 정상성의 망상에 빠져버린 김형도와 무능력과 욕망으로 점철된 오성철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본능과도 같다. 터지지 못한 욕망은 은밀하게 곪아간다. 거세된 존재들은 냉혹한 동물의 왕국에서 무기력하게 길을 잃고, 영문을 모른 채 공포에 질려 허둥대는 멧돼지와 함께 엉겨붙어 폭발했다. 그리고 남은 한 조각은 한없이 투명했던 소녀의 다리에 박힌 유리조각이 되었다. 흰색 양말에 번져나던 붉은 선혈과 녹색의 유리조각, 짐승들이 딛고 서 있는 저 건조한 황토의 색까지. 길 잃은 짐승들을 안내하는 신호등이 순간 반짝한다. 그 소녀가 앉았던 자리는 어느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동생이 또한 투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건 감독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장면이다. 환멸과 혐오만 남은 도시. 냉혹한 동물의 왕국에서 실종된 인간다움에 대한 갈증. 감독과 관객이 함께 만들어 낸, 몸부림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애니멀 타운에 남겨둔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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