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31

[영화] 너를 정리하는 법

# 이 글은 월간 노동과희망 제569호에 송고된 글입니다.   빈 공간을 탐험하는 영화,  “미니멀리즘은 불교와 유사하죠. 집착을 버리는 거예요” 텅 빈 공간 위로 낮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온다. 흰 옷을 입은 주인공이 순백의 공간에서 곧게 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여긴 집이었어요. 집을 사무실로 개조한 거죠. 세간살이는 다 버렸어요. 쓰지 않는 물건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요령을 묻는 인터뷰어의 마지막 질문이 이어지고 주인공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2019) 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웨덴에서 3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 진(추띠몬 쯩짜런쑥잉)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미니멀리즘..

film 2024.10.30

[영화] 카운터스

# 이 글은 월간 노동과희망 제565호에 송고된 글입니다.  카운터스> 정의로운 폭력의 말로 일본의 보수 세력은 아베 총리가 집권한 뒤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매해 인종차별 관련 집회만 300여개가 개최되었다. 재일한국인, 아이누(홋카이도 원주민), 일본계 브라질인 등 일본 내 소수 민족과 한국인, 중국인을 주요 대상으로 한 혐오 발언들이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했다. 특히 극우 논객 사쿠라이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은 코리아타운을 타겟으로 가두시위를 벌이며 재일한국인들을 향해 거침없는 폭언과 공격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코리아타운을 뭉개버리고 가스실을 만들자, 거리에서 한국여자를 보면 돌을 던져도 강간해도 무방하다, 같은 구호가 쏟아지는 시위였다. 물..

film 2024.10.30

[영화] 이장

# 이 글은 월간 노동과희망 제563호에 송고된 글입니다.   가부장제라는 재난을 버티는 중입니다 한국 독립영화는 올해에도 여성 서사들이 강세다. 지난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59관왕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적지 않은 관객수를 동원했다. 이후 , 등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꾸준히 대중의 선택을 받았고 올해 와 그리고 로 이어졌다. 그중 와 는 영화감독의 꿈이 좌절되고 마흔 살이 된 여성 프로듀서와 실존하는 여성 야구 선수를 통해 유리 천장으로 대표되는 세계를 다룬다. 이 영화들은 굳이 여성 영화로 묶지 않더라도 희소성 있는 여성 캐릭터와 영화, 야구라는 낯선 소재로 어느 정도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 ..

film 2024.10.30

[영화] 김씨표류기

# 이 글은 월간 노동과희망 제563호에 송고된 글입니다. 김씨표류기Castaway On The Moon>(2009) - 매혹적인 이야기의 쓸쓸한 결말 최성규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류덕환)는 성전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간다. 마돈나처럼 섹시한 여성이 되고 싶은 동구가 가진 유일한 재능은 하필이면 씨름이었다. 500만원을 손에 쥐기 위해선 인천시 고등부 씨름대회에서 우승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맨 살을 맞대고 모래에 처박혀야 한다. 나의 독재자>에서 성구(설경구)는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는다. 군사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에 쓸 배우를 찾고 있다. 무대 공포증으로 설 자리가 없던 연극배우에게 이 무대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film 2024.10.30

[영화] 옥포만에 메아리칠 우리들의 노래를 위하여

# 제20회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송고된 글입니다.    [프로그램 노트]  (1991, 다큐멘터리 작가회의, 40 min)다큐멘터리 작가 회의가 남긴 두 편의 영상 중 대우 조선 노조의 파업 투쟁을 다룬 는 과 여러 면에서 비교되는 작품이었다. 이 오랜 시간을 들여 형식과 플롯을 고민한 뒤 제작에 들어간 반면, 이 영화는 단 몇 차례의 촬영만 진행한 뒤 조합원이 찍어놓았던 영상을 더해 편집되었다. 당시 을 기획 중에 있던 제작진들이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총파업을 벌인 조선 노조에 연대할 목적으로 긴급하게 현장에 투입되어 사전 기획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의 작업 과정에서 우연히 탄생한 이 작품은 오히려 작가 회의가 추구했던 리얼리티와 설득력을 갖춘 다큐멘터리로 평가받게 된다.두 작품의 구성은 크..

film 2024.10.30

[영화] 전열

# 제20회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송고된 글입니다.    [프로그램 노트]  (1991, 다큐멘터리 작가회의, 53 min)  1990년, 여성영화집단 ‘바리터’와 서울 영상집단 등이 결성한 다큐멘터리 작가회의는 두 편의 영상을 세상에 내놓고 다음 해 해산한다. 87년 6월 민중 항쟁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은 노동 운동과 투쟁하는 노동자의 삶을 담기 위한 의기투합이었다. 이들은 노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노동조합 운동을 각각 다룬 (1991)과 (1991)는 대공장 노동자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과 정체성을 고민하고 질문을 던진 작품으로 평가된다.은 88년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의 투쟁사를 정리하고, ..

film 2024.10.30

[영화] 리틀보이12725

# 이 글은 비평 전문지, 제49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 송고된 글입니다.  [작품론] : 오직 영화만 할 수 있는 작별인사 영화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제목은 리틀보이12725. 제목의 의미소는 다음과 같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코드명, 리틀 보이. 원폭 후유증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을 안고 태어나 내내 왜소하고 연약했던 사내, 故김형률. 그리고 그가 생존해 있었던 날, 12725일. 는 원폭 2세의 고통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리고 35살의 짧은 생을 반핵평화운동가로 살다간 김형률의 이야기다. 남자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35년에서 50일이 모자란 12725일이다. 이 숫자의 의미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해된다. 김형률의 일기가 전시되는 마지막 시퀀..

film 2024.10.30

[영화] 김군

# 이 글은 월간 [예술부산] 2019년 9월호에 송고된 글입니다.  영화 김군>의 어떤 선택  인물의 행방을 쫓는 장르물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미해결 사건과 수상한 단서들이 부추기는 호기심. 누락된 증거와 새로운 증언의 등장이 가져다 주는 흥분. 끊임없이 해체되는 사실 관계들. 80년 광주 항쟁에 참여한 신원 미상의 시민군을 찾아나서는 은 이 같은 장르적 긴장감이 한껏 전개되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어딘가 이상한 장면들이 있다. 영화의 동력에 제동을 걸고 머뭇거리거나 낯선 곳에서 서성거리는 듯한 순간들이다. 이 불안감은 김군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신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커져갔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시야를 좁혀가던 에너지가 힘과 방향을 잃었을 때..

film 2024.10.30

[영화] 서산 개척단

# 이 글은 비평 전문지, 제48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 송고된 글입니다.  [작품론_서산 개척단]  야만의 시대, 이야기꾼을 향한 청원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있는 녹슨 문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을 보는 동안 끔찍한 폭력의 역사를 온전히 떠올렸다. 1961년 사회명랑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납치해 대규모 간척사업에 동원했던 사건, 대한청소년개척단이 세상에 알려졌다. 박정희판 군함도로 명명된 해당 사건은 이 지면에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산개척단>은 57년간 봉인된 국가 폭력과 기만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했다. 사건을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침묵하던 피해 당사자들이 거리로 나서는 과정까지 담아내 큰 울림을 주었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 못했지..

film 2024.10.30

[단편선] 김정은 감독

# 이 글은 2018 독립영화 쇼케이스 기획전(주관: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송고된 글입니다.   [쇼케이스 리뷰] 김정은 감독 단편선  한 작가의 단편선, 특히 아직 장편을 발표하지 않은 작가의 단편을 모은 기획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어딘가 고백적이고 함축적으로 읽히는 문장들. 반복되는 단어, 정념. 혹은 루틴. 이를 발견하거나 찾는 일은 비평의 토양이자 과정인 동시에 한 작가를 기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김정은의 영화는 사적이면서 디아스포라적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감독과 동시대를 살아간다.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다른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때로는 자리를 바꾸는 서로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도 한다. 이 움직임은 너무 조용하다. 마치 모두가 떠난 텅 빈 공간을 뒤늦게 찾아온 것 같은 쓸쓸..

film 202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