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비평 전문지, 제49호 독립영화(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 송고된 글입니다.
[작품론]
<리틀보이12725> : 오직 영화만 할 수 있는 작별인사
영화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제목은 리틀보이12725. 제목의 의미소는 다음과 같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코드명, 리틀 보이. 원폭 후유증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을 안고 태어나 내내 왜소하고 연약했던 사내, 故김형률. 그리고 그가 생존해 있었던 날, 12725일. <리틀보이12725>는 원폭 2세의 고통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리고 35살의 짧은 생을 반핵평화운동가로 살다간 김형률의 이야기다. 남자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35년에서 50일이 모자란 12725일이다. 이 숫자의 의미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해된다. 김형률의 일기가 전시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영화는 그의 일기장 위에 숫자를 새긴다. 페이지가 넘겨질 때마다 숫자도 늘어간다. 숫자가 12725일이 되면 남자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조용히 넘겨지는 노트 앞에서 남은 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메모 속에서 김형률의 세계는 확장되고 죽음에 가까워진다.
<리틀보이12725>는 김형률의 삶이 아닌 죽음을 들여다본다. 어두운 밤, 티니언 섬1)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태평양 전쟁 당시의 푸티지들과 오늘날의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2)의 풍경을 경유해 경남 합천에 안장된 김형률의 무덤으로 안내한다. 묘(墓)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부재는 다음의 장면들에서 환기된다. 도입부에서, 티니언 섬을 소개하는 나레이션은 이야기가 끝날 즈음 이런 말을 한다. ‘만약 원자폭탄이 남아있다면 리틀보이와 팻맨3)의 희생자들은 살아있겠죠’. 이 말은 다른 시공간에서 반복된다. 티니언의 어둠 속 그리고 원폭 1세인 어머니의 고향 히로시마와 김형률의 방에서 되풀이되고 낮게 읊조리며 그의 죽음을 일깨운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와 그가 벌인 활동들, 젊은 날의 사진, 메모와 편지들은 소멸해가는 마지막 장면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아들의 영가를 천도하는 어머니의 독음(금강경 제28장 불수불탐분)이 들려오면 김형률의 생이 요약된다. ‘핵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삶은 계속 되어야한다’가 적힌 묘비와 티니언 섬, 구름 낀 태평양의 하늘을 차례로 지나 그의 노트 위에서 화면이 멈춘다. 흘려 쓴 글씨 위로 남은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 숫자가 오버랩된다. 흠모했던 사람이 꿈에 나타났던 7148. 아무에게도 연락이 없는 무섭도록 공허했던 어느 날 7273. 다시 생을 움켜쥘 다짐을 했던 7355. 히로시마를 처음으로 방문한 11413. 일본 원폭 2세로부터 연락받고 가슴이 뛰었던 11519. 폐렴 재발, 응급실 11928. 봄비가 내린 11946. 히로시마원폭투하58주년/한국원폭2세환우회1주년 12063. 삼십여 분간 기침, 집중해야 한다 12681. 일본동경국제회의 12718. 숫자들은 12725에 가까워질수록 빠른 속도로 점멸한다.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죽음을 쌓아 간다. 그리고 끝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페이지와 숫자 12725에 도착한다. 안타깝게 흐르던 시간도 어머니의 천도가도 멈춘다. 작은 우주가 소멸된 것이다.
이 결말이 울림을 주는 까닭은 단지 죽음이 안타깝거나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과업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리틀보이12725>에는 정체모를 시점 샷들이 도처에 있다. 마치 영화가 제 발로 움직이는 것 같은 장면들이다. 김형률의 묘를 찾아간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몸을 한껏 낮추고 먼발치에서 무덤을 우두커니 지켜본다. 한동안 억새풀에 몸을 숨긴 카메라는 인접한 도로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거나 잡초가 한껏 자란 발밑을 살피며 걷기도 한다. 이 낯선 시선은 김형률의 방 안에서도 등장한다. 불 꺼진 방에서 열린 창문을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창 밖에선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화려한 빛과 소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이 장면 뒤로 김형률이 직접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과 스냅사진이 삽입된다. 카메라가 한동안 응시하던 바로 그 창으로 반쯤 몸을 내어 촬영된 영상과 사진이다. 이 편집은 낯선 시선이 김형률의 것임을 암시한다. 김형률의 시점을 의도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은 대학 선배에게 쓴 편지가 소개되는 장면이다. 영화는 대부분 그가 남긴 메모들을 그대로 화면에 담았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타자음과 함께 문장이 완성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편지의 화자가 직접 키보드를 두드리며 야학을 소개한 미해 누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7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김형률의 죽음과 그 이유를 설명하던 영화는 그가 떠나고 남은 장소를 망자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리틀보이12725>가 보여주는 시간이 특별하게 감각되는 이유다. 안타까운 과거사와 희생자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과거의 사건과 여전히 투쟁 중인 오늘을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해왔다면, <리틀보이12725>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김형률을 대면하게 한다. 김형률의 환영을 영화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의 죽음과 부재를 껴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어루만진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김형률의 방에 쌓여있던 책과 자료들이 박스에 실려 나가고 난 다음이다. 사람들이 모두 퇴장한 빈 방의 한쪽 벽을 향해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 낡은 벽지, 조악한 선반 위에 떼어낸 액자들과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오른쪽으로 낡은 책상이 있고 왼쪽 벽에는 시계가 걸려있다. 생전에 쓰던 물건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위로 기자회견장4)에서 발언하는 김형률의 음성이 들려온다. 육체를 잃은 목소리가 쓸쓸하게 방을 채운다. 이 장면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약 3분간 지속된다. 그런데 화면 한구석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이 움직임을 보게 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벽시계는 화면의 한쪽에서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3시 25분을 지나는 시계가 약 2분간 거꾸로 돌아 3시 23분이 될 무렵, 순간적으로 모든 바늘이 이동해 다시 3시 25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번엔 올바른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약 1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3시 26분이 되어갈 즈음 그의 발언이 마무리되면서 이 장면은 끝이 난다. 시간이 잠시 거꾸로 갔다가 되돌아간 뒤 다시 온전하게 흐른 3분여 동안 김형율의 육성은 끊기지 않고 흐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장면은 벽시계를 제외한 피사체들의 움직임이 없을 경우, 3분간 촬영한 영상을 약 2분 동안 거꾸로 재생하고 나머지 1분은 그대로 이어 붙인 뒤 김형률의 음성을 입히면 가능하다. 영화는 왜 이런 편집을 보여주는 것일까. 왜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화면 한구석에 놓아둔 것일까. 이 장면을 발견하고 영화를 다시 보았다. 어느새 모든 장면이 김형률의 눈을 통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홀로 티브이를 보는 노모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무너져 있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김형률 추모 행사에 나타난 카메라는 모인 사람들을 오랫동안 비춘다. 카메라를 들고 찍고 있는 그가 보인다. 관객은 알 리 없는 얼굴을 하나하나 찾아가 오랫동안 눈에 담고 있다. 떠났던 이가 다시 돌아와 아무도 모르게 무덤에 다녀오고, 그리웠던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방 안에 앉아 하염없이 창문을 바라보고 일기장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차례 들고나간 빈 방. 초침 소리만 남은 그곳에도 그가 있다. 잠시 카메라를 놓고 벽시계를 만지작거린다. 되돌리고 싶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순 없다고, 조용히 시계가 응답한다. 영화만이 가능한 애도였다. <리틀보이12725>는 남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늦은 인사를 전하는 김형률의 몸이자 오직 영화만 대신할 수 있는 작별인사였다.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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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니언섬(Tinian Island)은 미군의 원자폭탄 기지로 사용된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으로 괌에서 북쪽 160km, 사이판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인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원자폭탄을 탑재하고 티니언 섬에서 이륙해 약 2531km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세계 최초의 핵공격이었다.
2)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3일이 지난 1945년 8월 9일, 일본의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 역시 티니언 섬에서 이륙했다.
3) ‘팻맨’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코드명이다.
4)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한국 최초로 원폭2세 피해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피해자 지원 및 반핵운동을 펼쳤다. 아오야기 준이치 (부산대), 조석현 (전교조) 등이 주축이 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과 서울의 관련 시민단체들은 원폭2세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 결의해 2003년 8월 5일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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