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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에치던 방

몽상(최성규) 2024. 10. 29. 13:09

# 제134회 독립영화 쇼케이스(주관: 한국독립영화협회) 에 송고된 글입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고 관계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독백 혹은 방백에 가까운 대사들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관객마저 고립시킨다.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힘겨운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점프된 시간과 관계에 곤혹해 하며, 절망스러운 현실에 방치된 존재들을 뒤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버텨내는 동안 우리도 견뎌야 한다는 감독의 주문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퍼즐같은 등장 인물의 관계도가 완성되면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 의식된다. 우리 모두의 얼굴을 하고 있는 4명의 인물(미희, 성숙, 익주, 유영)을 만나게 된다.

 

미희(이상희)는 끝내 사법고시에 실패한다. 동시에 연애도 부모와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지난 10년은 그녀의 역사에서 없는 시간과 다름없다. 과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미희는 15년 전의 일을 두고 뜬금없이 선배를 불러내 사과를 하거나 학창시절 단짝 친구였던 근경(정원)에게 집착하지만 여의치 않다. 영화는 미희에게 가장 가혹한 주문을 한다.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얼굴, 유년의 분신같은 존재(유영)을 쫓게 함으로써 고립된 상황을 돌파하게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과거의 문을 세차게 닫아버린다.

 

성숙(홍승이)은 등장 인물 중 가장 유연하지만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실존과 이상 또는 생존과 욕망 가운데에서 그녀의 모습은 돈키호테를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고 변혁을 갈망하는 활동가인가하면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의 연구 인력이기도 하다. '촛불 동지'를 비웃는 말에 항의하면서도 프로젝트 관리자에게는 '논리를 만들어보겠다' 며 타협하기도 한다. 감독은 성숙을 통해 수많은 메세지와 삶의 태도를 전달하지만 성숙 역시 만만치 않은 시대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익주(임형국)은 내내 지쳐있다. 유영, 성숙과 처음 만난 한강 고수부지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세상의 이치가 궁금하고 온 몸으로 실천하고 싶었던 유영의 스승과도 같았던 익주. 그의 에너지는 서서히 소멸해 간다. 유영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 유치된 경찰서에서 익주는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빈 종이에 민주주의를 끄적거린다. 이 장면에서 유영은 익주를 떠나고 만다. 성년이 되어 그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 창작이 아닌 인쇄업이라는 점, 사양 산업에 접어든 낡은 인쇄소의 풍경과 더 이상 인쇄물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찬란했던 유년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유영(김새벽)은 닿을 수 없는 존재와 다른 세상으로의 탈출구 같은 존재로 양분된다. 영화의 첫 장면. 유영을 실은 운구 버스가 학교 운동장을 돌고 빠져나가면 등장하는 제목, 누에치던 방. 부감숏으로 촬영된 첫 장면은 만질 수도 따를 수도 없는 그녀와의 거리를 보여준다. 과거형으로 명시된 제목은 나비가 되지 못한 그들 모두의 유년과 이상idea 이었던 유영을 함의하는 공간의 다른 이름이다. 유영은 그렇게 닿을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녀의 부재는 '욱하는 데가 있던, 정념적으로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일한 설명이다. 감독은 공산주의, 독재, 프롤레타리아, 프루주아, 진보, 광화문 등 사회 정치적인 단어를 곳곳에 배치하고 제 3자의 입을 통해 이를 관습적이고 진부한 것으로 그려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희의 입을 통해 더 먼 곳으로 밀어낸다. 여기도 힘들어요. 이런 걸 왜 물어요? 그렇게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밀어낸다. 또 한 명의 유영은 나머지 세 명의 인물을 연결한다. 인간을 증오하게 된 익주를 유일하게 끌어안은 미희, 고립된 미희를 끌어올리는 성숙, 익주를 떠나 홀로 수술을 받게 된 성숙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는 미희를 순환하며 위로하는 존재로 병치시킨다.

 

세상은 염세적일 수 밖에 없지만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아이러니.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동일한 얼굴로 등장했던 유영은 염세와 희망이라는 모순적인 텍스트를 포기하지 못한 감독의 열쇠같은 존재다. 이 영화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미희가 죽는 씬과 성숙에게 달려가는 씬이 연결되는가 하면, 학교 앞에서 미희가 유영에게 꽃을 건네는 장면과 쪽지를 건네는 다음 장면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인다. 현실세계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감독은 유년을 보내기 위한 굿판 같은 영화라는 연출의 변을 남겼다. 모순적이고 불가역적인 시대에 굿이라도 하지 않으면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조용히 공명한다. 이 영화는 배경음악이 없다. 배우가 무반주로 부르거나 실제 밴드의 공연 영상이 전부다. 어떤 색으로도 채색하지 않은 영화가 엔딩곡으로 조동진의 음악을 선택했다. 깊은 서정으로 한 시대를 위로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 떠난 그의 영혼까지 위로하는 영화가 되었기를.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감독의 애타는 전언이 우리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최성규 / 한독협 비평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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